세계관

작성자: 김유동 작성일: 2026.06.18

But-cherry world



In The Mood For Love - Yumeji's Theme [4K]




  1. 1990년대 홍콩, 구룡성채 (九龍城砦)


낮에도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곳이 있다. 머리 위로는 얼기설기 엮인 전선들이. 좁은 골목에는 오래된 간판과 빨랫줄, 녹슨 철제 계단과 물이 새는 배관들이 얽혀 있는 곳.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늘 축축한 이곳을 사람들은 구룡성채(九龍城砦)라 불렀다.


하수 냄새와 기름 냄새, 담배 연기와 익숙한 음식 냄새가 한데 뒤엉켜 이곳에 메여 있다. 골목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하늘은 점점 가늘어지고, 사람들은 그 좁은 틈으로 흘러드는 빛을 보고서야 바깥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많은 것들이 분명하지 않았기에.


한편 바깥세상은 격변의 시대를 맞았다. 번쩍이는 빌딩과 유리창에 비치는 네온사인. 영국의 식민 통치가 끝나고, 1997년 중국으로의 반환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 사람들은 앞으로 홍콩이 어떻게 변할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가진 돈을 해외로 옮기거나 이민을 준비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새로운 시대가 오면 더 큰 기회가 열릴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반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고, 거리에서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래, 홍콩은 그랬다. 모든 건 번듯한 홍콩에나 적용되는 이야기들이었다. 구룡성채 안의 시간은 달랐다.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눅눅하고 거칠게. 언제라도 끊길 듯하면서도 기어이 이어지며. 누군가는 이곳을 더러운 동굴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도시라고 불렀다. 어느 쪽이든 틀린 말은 없었다.


철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오가는 시기에도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떠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떠나기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을 품고 있는 사람들. 구룡성채는 그런 이들을 오래도록 품어왔다. 법이 완전히 닿지 않는 곳은 아니었지만, 법보다는 소문과 돈, 연줄과 이해관계가 먼저 닿았다. 그러니 이곳에 발 들인 이상 누구도 완전히 깨끗할 수 없다. 만약 무결함 따위를 기대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순진한 바보쯤으로 여길 테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더러움을 들춰내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곳에서는 남의 비밀을 모른 척하는 것 역시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였으니까. 밤이 되면 구룡은 더 짙어졌고, 삼켜내야 할 비밀들도 많아졌다. 문을 닫은 가게들 사이로 여전히 불이 새어 나오는 곳들이 있었다. 늦은 식당, 불법 진료소, 작은 도박판, 이름 없는 숙소. 그리고 누가 드나드는지 알 수 없는 뒷문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익숙하게 지나쳤다. 무엇을 보았는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무엇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양기선육의 간판 역시 눈에 들어온다. 낮에는 고기를 파는 정육점. 동네 사람들과 거래처 직원들이 드나드는 평범한 가게. 그러나 셔터가 반쯤 내려간 뒤에도 안쪽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 있었고, 누군가는 그 앞을 지나가며 무심코 걸음을 재촉했다.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당신은……



  1. 양기선육 (梁記鮮肉)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가게가 아니다. 오래된 붉은 간판은 군데군데 색이 바래 있고, 유리문에는 손님들이 밀고 당긴 자국이 희뿌옇게 남아 있다. 문 앞에는 그날 들여온 고기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둔 낡은 판이 걸려 있고, 안쪽에는 정육점 특유의 시뻘건 조명이 번져 당신에게 닿는다. 진열된 고기들은 실제보다 더 선명하고 붉어 보였다. 가지런히 놓인 칼과 저울, 포장지 같은 것들도 손님을 맞았다. 처음 오는 손님이라면 그저 오래된 동네 정육점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양기선육은 보기보다 큰 가게다. 손님이 드나드는 앞쪽 공간은 그리 넓지 않지만, 안쪽은 이야기가 달랐다. 손님에게 보이지 않는 문 너머로 이어지는 작업 공간. 차가운 공기가 고여 있는 넓은 손질실, 물청소를 하기 쉽게 기울어진 바닥. 벽에는 여러 개의 칼과 갈고리가 걸려 있고, 천장의 형광등은 늘 희게 깜박인다. 쇠 냄새와 생고기 냄새는 깊게 배어 잠시도 빠져나갈 줄을 몰랐다. 기분 나쁜 피비린내, 그 냄새의 한가운데에는 늘 이 가게의 주인인 양조현이 있었다.


양기선육은 낮 동안 제법 바빴다. 단골들은 값을 흥정했고, 식당에서 보낸 심부름꾼들은 주문한 고기를 받아 갔다. 양조현은 웃으며 고기를 썰었고, 그의 아내 백연은 계산대 옆에 서서 장부를 넘기거나 손님에게 나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백연이 나오는 날이면 손님들은 괜히 한 번 더 말을 붙이곤 했다. 낡은 가게였지만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고기 질이 좋고, 손질이 깔끔하고, 납품 시간이 정확하다는 이유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골목의 불빛마저 뜸해질 무렵이면, 양기선육의 진짜 영업이 시작됐다. 낮에는 돼지와 소를 다루는 평범한 정육점이었지만, 밤에는 사람이 드나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 혹은 더는 살아 있다고 부르기 어려운 사람. 양조현은 낮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것들의 상태를 살피고, 값을 가늠하고, 어디까지 남길 수 있을지 판단했다. 필요하다면 백연은 계산대 옆에서 검은 장부를 펼쳐 붉은 펜으로 숫자를 적었다. 들어온 사람의 수, 받은 돈, 처리된 물건의 양 같은 것들. 그리고 어떤 이름이 더 이상 불리지 않게 되었는지. 물 흐르는 소리와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아침이 가까워지면 바닥은 다시 씻겨 나갔다. 깨끗하게.


다음 날 아침, 양기선육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진열대 위의 고기들은 여전히 붉었고, 양조현은 웃으며 손님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엇으로 드릴까요.



  1. 집 (家)


두 사람이 사는 집은 양기선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복도에는 늘 습기가 차 있었다. 오래된 철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그대로 드러난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자주 밟힌 자리는 반질하게 닳아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물자국과 잔금이 남아 있었다. 벽지는 모서리마다 조금씩 들떠 있었고, 낮은 밥상과 오래된 선풍기가 방 한쪽을 차지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검소했다. 어떤 날에는 조금 허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양조현이 돈을 벌지 못해서 그런 집에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보기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낮의 장사도 나쁘지 않았고, 밤의 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 돈은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아버지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갚았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이름의 이자가 붙었고,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래된 약속처럼 다른 빚이 고개를 들었다. 양조현은 그것을 싫어하면서도 외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남긴 가장 끈질긴 유산은 정육점도, 칼 쓰는 법도 아니었다. 어쩌면 갚아도 갚아도 줄어들지 않는 숫자들이었다.


그래서 양조현은 종종 다른 집을 떠올렸다. 구룡성채 바깥의 넓은 집. 천장이 높고, 복도에 습기가 차지 않고, 창문을 열면 하늘이 통째로 보이는 집. 백연이 집 안을 오가도 좁아 보이지 않을 집. 낡은 콘크리트 바닥 대신 깨끗한 바닥이 있고, 피 냄새가 배지 않은 침구가 있고, 차가운 형광등 대신 햇빛이 들어오는 부엌이 있는. 양조현에게 그런 집은 언젠가 도달해야 할 곳이었다.


그 꿈은 사치라고 볼 수 없었다. 양조현에게 구룡을 벗어난 집은 빚이 끝났다는 증거일 테니까. 아버지의 실패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증거일 테고, 백연에게 제대로 된 남편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좋은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아내에게 좋은 집 하나쯤은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었다.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돈을 벌었다. 언젠가 문턱을 완전히 다른 곳에 세우기 위해서.


그것을 문턱 안의 안주인인 백연이 바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피안(彼岸)은 처음부터 같은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