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verphonic - 2 Wicky (Live at Koningin Elisabethzaal 2012)
비가 오는 날이었다. 이곳의 비는 깨끗하게 내리는 법이 없었다. 비가 곧장 땅으로 떨어지지 못했으니까. 수없이 덧댄 층과 층 사이를 더듬고, 창문과 금속의 가장자리를 스치며 천천히 아래로 추락한다. 그렇게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무심하게 짓밟는 사람들. 그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양조현은 마지막 손님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이제 마감할 시간이다. 한결 조용해졌지만 아직 손 놓기엔 일렀다. 작업대 위에 남아 있는 고기들을 정리해야 했고, 바닥에 튄 핏물도 한 번 더 닦아내야 했다. 남자는 도마 위에 남은 고기를 들어 올려 정리하고, 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씻는다.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늘 반복되는 것들이다. 도마를 물로 헹구고, 칼날에 남은 기름기를 닦아내고, 배수구로 흘러가는 붉은 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눈을 깜빡이고 있으면 문앞의 종이 울린다. 오늘 밤에 오기로 한 사람은 없으니, 늦은 손님인가? 남자가 고개를 들면 그 앞에는 처음 마주하는 여자가 서 있다. 문 열린 틈으로 밀려들어온 비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희미한 꽃향기. 한눈에 보아도 이곳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여자다. 가게 문틀이 낮아 보일 만큼 큰 키, 젖은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하얀 옷, 어깨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붉은 조명은 그 여자를 비껴가는 듯했다.
이상한 여자였다. 구룡성채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었지만, 이 사람은 그런 부류들과는 달라 보였다. 깨끗해서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도 나름 돈 많은 사람이 있었고, 옷차림이 단정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처음 보는데도 시선이 끌려가는 이유를 마땅히 찾을 수 없다. 이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 의아하다. ……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종류의 낯섦이다. 멈칫한 것도 잠시. 양조현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마감 직전인데요, 누님.”
일부러 가볍게 말하는 투. 늦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에게는 대개 그런 식으로 굴었다. 웃고, 낮추고,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폈다. 고기를 사러 온 사람인지, 길을 잃은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용건을 품고 온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구룡성채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온 모든 사람이 손님인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자는 대답 대신 진열대를 살폈다. 남은 게 있나? 이 시간이면 남은 고기는 몇 없을 테다. 시선은 붉은 살점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끝을 쫓으면 도착지는 제 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칼을 쥔 손. 그 시선을 의식하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간다. 양조현은 웃음을 거두지 않고 묻는다. 뭘 드릴까요.
그 말까지 나오고 나서야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교차한다. 흐릿한 눈동자와 까만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한다. 먼저 눈을 깜박인 쪽은 양조현이다. 아마 불편해졌기 때문일 테다. 원래 보통의 사람들은 정육점을 보는 법이다. 고기를 보고, 가격을 보고, 칼질을 본다. 그런데 이 여자의 시선은 자꾸만 ‘나’를 향하는 것이 꺼림칙하다.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사장님 손이 닿은 건 다 좋아 보이네요.”
짧은 침묵. 남자가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제 손을 한 번 내려다본다. 축축한 손. 그리고 물기 탓인지 형광등 아래에서 칼날이 희게 번뜩인다. 칼끝이 도마 가장자리에 탁, 하고 작게 걸린다. 손이 닿은 건 다 좋아 보인다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고기를 보러 온 손님이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치지만, 양조현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아쉽게도 오늘은 좋은 게 다 나갔는데. 다음에 오시면 좋은 걸로 드리죠.”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는 뜻이면서도, 다시 올 거면 와도 좋다는 모호한 말을 내놓는다. 그 말에 여자가 작게 웃는다. 눈매가 휘고, 입술 끝이 천천히 올라간다. 그러면 자연히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왜 이런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는지. 왜 고기보다 손을 보는지. 왜 저런 얼굴로,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제 앞에 서 있는지….
“그럼, 다음에 또 와도 되나요?”
나긋한 목소리로 던지는 말이다. 물러설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양조현이 느리게 바깥으로 초점을 옮긴다. 문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물 떨어지는 소리, 멀리서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소리, 위층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발소리. 익숙한 소음들이 가게 밖을 채우는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조용하다.
“…손님이면 언제든 오셔도 되죠.”
양조현이 대답했다.
“손님이 아니면요?”
여자는 바로 되물었다.
순간 양조현이 웃음소리를 낸다. 재미있어서 웃은 것인지, 아니면 불쾌해서 웃은 것인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다만 이 여자가 평범한 손님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해졌다. 구룡성채에서 평범한 고기를 사러 온 손님이 아니면서 정육점에 들어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개 길을 잘못 들었거나, 무언가를 알고 있거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러 온 사람들뿐이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왜요?”
“손님이 아닌 사람이 가게에 찾아오면, 좋은 일은 없더라고요.”
여자는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즐거워 보였다. 양조현은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한 발쯤 물러난다. 농담인지 아닌지 가늠하지 못해도 일단 웃으며 거리부터 벌린다. 그런데 이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진열대 너머의 붉은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양조현의 손으로 시선을 내릴 뿐이다.
“사장님은 좋은 일만 하시나요?”
부드러운 질문이었다. 양조현은 짧게 고민했다. 좋은 일. 그런 말을 이곳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양기선육에서, 마감 직전의 정육점에서, 비에 젖은 옷을 입은 여자의 입에서. 남자는 웃음을 유지한 채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고기는 좋게 해드리죠.”
“그럼 됐어요.”
여자가 대답했다. 정말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이어서 담담한 목소리로, 그러면 오늘은 그냥 갈게요. 그녀는 아쉬움을 내비치지도 억지로 붙잡히길 기대하지도 않았다.
“내일 오면 좋은 거 있나요?”
양조현은 도마 위에 손을 얹은 채 여자를 응시한다.
“운 좋으면요.”
“그럼 운을 믿어봐야겠네요.”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투였나. 이내 문 앞의 종이 작게 흔들린다. 여자는 돌아서기 전에 한 번 더 양조현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가 잠시 빛을 머금었다 사라진다.
“내일 봬요, 사장님”
양조현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농조로 대꾸한다.
“좋은 걸 남겨둘지는 장담 못 할지도 모르죠.”
“괜찮아요.”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웃음이 천천히 그 얼굴 위로 번져 간다. 꾸며내려는 것도, 감추려는 것도 없다.
“없으면 그 다음 날 또 오죠.”
문이 열렸다. 비 냄새가 먼저 밀려 들어온다. 그다음으로는 젖은 골목의 냄새,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악취 같은 것들. 여자는 그 틈으로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간다. 흰 옷자락이 문턱을 지나고, 긴 머리카락 끝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양조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일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여자. 고기를 사러 온 것도 아닌데, 고기를 보러 온 척했던 이상한 손님. 그저 늦은 시간의 불청객일 뿐인데도 시선을 거두는 일이 쉽지 않다. 젖은 바닥 위에 번진 붉은빛이 여자의 발밑에서 흔들리고, 그 실루엣은 어두운 골목에서도 좀처럼 흐려지지 않는다.
보통 저런 사람은 이곳에 오래 남지 못한다. 너무 깨끗한 것은 금세 얼룩지거나, 부러지거나, 제 발로 도망치기 마련이었으니까. 우습게도 그 여자는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건 직감이었다. 이곳의 축축한 공기와 피 냄새, 어두운 골목과 낡은 간판들이 언젠가 그녀의 배경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
…….
양기선육의 정적이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가게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게 안에 무언가 남아 있는 것은. 백합 향인지, 비 냄새인지, 아니면 제 손을 바라보던 그 여자의 시선인지 알 수 없었다. 양조현이 피식 웃었다. 이상한 누님이네. 혼잣말은 물소리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그는 다시 칼을 들었다. 영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씻어내야 할 것들은 늘 남아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