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란
[ 문턱 앞의 도축자 ]
“하하, 아내가 기다려서요.”
외관
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 반쯤 웃는 듯한 눈매. 눈은 빛을 머금지 않는다. 눈맞춤으로 읽을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
턱선 아래에서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끊긴다. 앞머리는 이마를 무겁게 덮고, 그 탓에 눈가까지 그림자가 진다.
창백한 피부와 작은 체구 탓에 첫인상은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어딘가 앳되고 순해 보일지도 모른다.
언뜻 마냥 말라 보이나, 손과 팔에는 생활로 다져진 힘이 남아 있다. 애초에 고기를 자르고, 뼈를 가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전체적으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특별한 날에도 꾸미는 일은 없었다.
이름
梁朝玄 / 양조현 / Leung Chiu-yuen
서쪽에서 온 이들은 그를 Ewan(이완)이라 편히 부르기도 했다.
키/몸무게
162cm / 52kg
또래 남성에 비해 작은 편이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쉽게 스며들 수 있고, 눈에 띄지 않게 다가서는 일이 어렵지 않다.
성별
남성
성별을 헷갈리는 사람이 몇 있었다. 또래 남성에 비해 작은 키와 가는 체격, 턱선 아래에서 반듯하게 끊긴 칼단발 때문일 테다. 목소리도 크지 않고, 웃는 낯은 앳되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것이 곧 유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격
능청, 음침, 가정
능청
“아이고, 누님. 오늘도 곱게 오셨네.”
서글서글 잘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대한다. 말끝은 가볍고, 태도는 붙임성 있다. 나이 많은 손님에게는 능청스럽게 굽실거리고, 단골에게는 시답잖은 농담도 곧잘 건넨다. 오늘 고기가 좋다느니, 조금만 더 가져가면 덤을 얹어 주겠다느니.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말들을 아끼지 않는다. 웃는 낯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값을 부르고, 칼을 든다. 그 모습만 보면 제법 싹싹한 청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웃음이 언제나 선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조현은 사람을 대할 때 버릇처럼 웃었다. 친절해서가 아니라, 그 편이 일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 앞에서는 경계가 조금 느슨해지고, 가벼운 농담은 불편한 침묵을 덮어 준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속을 내보였다. 어떤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어떤 말에 약해지는지, 어떤 표정 앞에서 방심하는지. 양조현은 그런 것들을 유심히 보았다. 웃음은 호감의 표시라기보다 습관적인 장사 수완에 가까웠다.
흥미가 동하면 더 살갑게 군다. 꼬리라도 흔드는 것처럼 곁을 맴돌고, 듣기 좋은 말을 골라 건넨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별로. 자존심은 배를 채워 주지 않고, 위험한 상황을 피해 가게 해 주지도 않는다. 양조현은 굽힐 줄 알았다. 웃을 줄 알았고,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다만 그것이 순종을 뜻하지는 않았다. 고개 숙인 사람만이 상대의 발밑을 볼 수 있지 않던가.
반대로 흥미가 식으면 금세 건조해진다. 조금 전까지 웃으며 맞장구치던 사람에게도, 더 들을 말이 없다고 판단하면 고개만 기울였다. 도통 기준을 알 수 없는 제멋대로인 사람.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가볍게 흘려보낸다.
음침
“살아 있을 때보다 조용해서 좋죠, 고기는.”
양조현은 어딘가 꺼림칙한 사람이었다. 잘 웃고, 말도 곧잘 붙이고, 손님을 대하는 태도 역시 살갑지만, 오래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를 꼽자면 단연 속을 알기 어렵기 때문일 테다.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닌데도, 정작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다가도 문득 표정이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게다가 가끔 툭 던지는 농담은 그저 웃어넘기기엔 아슬아슬한 감이 있지 않던가. 양조현의 친절은 대체로 기분과 필요에 따라 움직였다. 흥미가 식으면 다정함도 금세 거둬졌고, 아니꼬운 일이 생기면 웃는 낯 그대로 선을 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편해할 법한 상황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다. 누군가의 울음, 비명, 간절한 부탁, 피 냄새, 어두운 골목. 양조현에게는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고, 어쩌면 제 발로 찾아가는 것들일지도 몰랐다. 제 발 밑에 누군가 있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비굴해질수록 느긋하게 입매나 더 올렸다.
그는 경계에 서는 것에 능숙했다. 농담과 협박 사이, 친절과 조롱 사이, 장사와 범죄 사이, 사람과 고기 사이에.
가정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려고요.”
가정적인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바닥에 나뒹군다고 해서 가정을 꾸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애처가다.
아내 이야기가 나오면 양조현은 쉽게 웃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이 무엇인지, 최근에 집에 들여놓은 꽃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는지 줄줄 늘어놓는다. 손에 피 냄새가 배어 있는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한 화제들이었다. 양조현은 그 평범함을 꽤 소중히 여겼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저에게는 큰 자랑거리였다.
그래서인지 양조현은 ‘집’으로 돌아갈 때만큼은 몸에 밴 냄새를 지우고, 손톱 밑을 씻고, 입었던 옷을 갈아입었다. 누군가는 유난을 떤다고 했다. 이 바닥에서 깨끗한 척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양조현이 제 손으로 더럽힌 것들은 물과 비누만으로 지워지는 종류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는 매번 씻었다.
아내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알고 있었으니까. 양조현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돌아오는지, 옷에 밴 냄새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늦은 밤 연락 하나에 왜 말없이 나가는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그를 내쫓지 않았고, 더러운 사람 취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수건을 건네고, 잠옷을 꺼내 두었다.
그러니 양조현이 깨끗함을 고집하는 것은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 앞에서만큼은 그렇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남편처럼은 보이고 싶었다. 밖에서 무슨 일을 했든 집 안에서는 밥을 먹고, 웃고, 아내의 말을 듣는 남편으로 남고 싶었다. 우습게도 양조현은 그 역할에 꽤 진심이었다.
기타
양조현에 대하여
2월 3일, 제법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이는 29세. 젊다고 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을 겪었고, 늙었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현재 가족은 아내 한 명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결혼 소식을 알려 주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내에 대한 가벼운 정보만 말하고 다닐 뿐, 자세한 것을 말한 적은 없다.
보기보다 큰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정육점 이름은 양기선육(梁記鮮肉). 동네 손님에게 고기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식당과 거래처에 고기를 납품하는 일까지 겸하고 있다.
정육점은 원래 양조현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였다. 정직하고 평판 좋은 가게는 어느 순간 양조현의 손에 넘어왔다.
好: 아내, 깨끗한 집, 잘 갈린 칼, 손님, 신선한 과일, 늦은 저녁의 식탁
不好: 착한 사람, 빚, 가족을 험담하는 사람
겸직
밤이 되면 양조현은 다른 종류의 거래를 한다. 낮에는 고기를 고르고, 자르고, 손질해 납품했다면 밤에는 사람을 고르고, 넘기고, 때로는 처리했다. 적절한 사람을 찾는 일부터 그의 몫이었다. 사라져도 오래 찾는 사람이 없을 사람. 이름이 있어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사람. 세상 가장자리에서 이미 반쯤 지워진 사람들. 양조현은 그런 이들을 알아보는 눈이 좋았다. 고기의 상태를 살피듯 사람의 처지를 살피고, 어디에 넘기면 얼마가 될지 가늠했다.
필요하다면 직접 손을 대기도 했다. 양조현에게 도축은 가업이었고, 동시에 기술이었다. 무엇을 어디까지 남기고, 무엇을 없애야 하는지 오래전부터 배웠다. 물론 늘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품은 온전할수록 비싸고, 입막음은 조용할수록 좋으니까. 양조현은 필요에 따라 처리할 줄 알았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던가. 양기선육이 잘나가는 정육점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낮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조현은 그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즐기는 쪽에 가까웠다. 특히 사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퍽 흥미로웠다. 비굴해지고, 울고, 빌고, 어제까지만 해도 붙들고 있던 체면을 제 손으로 내려놓는 얼굴들. 사람 하나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찾지 않는 밤. 세상은 언제나 조용했고, 누군가의 부재는 쉽게 메워졌다. 양조현은 그런 순간들을 좋아했다.
양조현은 낮과 밤의 일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이 소인지 돼지인지 사람인지,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 값은 좀 많이 차이나던가?
취미
취미라고 부를 만한 것은 많지 않다. 굳이 꼽자면 칼을 가는 일, 장을 보는 일, 집에 둘 꽃을 고르는 일 정도. 양조현은 손이 가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잘 갈린 칼과 깨끗하게 닦인 식탁, 제자리에 놓인 물건을 보면 묘하게 안정되는 듯했다. 쉬는 날에는 아내와 함께 시장을 돌거나, 별다른 목적 없이 오래된 영화를 틀어 두기도 한다.
말투
말투는 능청스럽고 가볍다. 손님에게는 웃어른을 대하듯 살갑고 예의 바르게 굴며, 가까운 사람에게는 장난스러운 농담에 빈정거림을 섞기도 한다. 아내에게는 보다 느슨해지고 솔직해진다.
평판
낮의 평판은 나쁘지 않다. 젊은 나이에 번듯한 정육점을 운영하는 싹싹한 남자. 손님 응대도 능숙하고, 고기 보는 눈도 좋다. 다만 오래 본 사람들은 양조현을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친절하지만 어딘가 꺼림칙하고, 잘 웃지만 쉽게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사람. 그리고 이 바닥 사람들에게는 유난스러운 애처가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일도 잘한다고 한다.
소지품
작은 접이식 칼과 손수건, 그리고 지갑을 지니고 다닌다. 칼은 일 때문이라고 둘러대고, 손수건은 손 닦는 데 자주 쓴다고 한다. 지갑 안에는 아내와 함께 찍은 작은 사진이 들어 있다. 현금을 많이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향
정육점 안에서의 양조현에게는 희미한 쇠 냄새와 생고기 냄새가 난다. 작업대와 칼, 핏물과 냉기가 뒤섞인 공간에 오래 머문 사람 특유의 냄새다. 손을 씻고 앞치마를 갈아입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손님들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는 그 냄새가 몸에 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집에서는 냄새가 한결 옅어지지만, 가까이에서는 여전히 원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비공개란
비밀 설정
양조현은 정육점 집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로 좋은 사람. 고기를 속여 팔 줄 몰랐고, 단골의 어려운 사정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으며, 친구의 부탁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지만, 적어도 인품 하나만큼은 훌륭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점.
가게가 잘 굴러가던 시절은 분명 있었다. 늦은 저녁이면 불이 켜진 집이 있었고, 성실하게 장사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친구의 연대보증을 서 준 뒤로 모든 것이 빠르게 기울었다. 빚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평판은 돈이 되지 않았고, 선의는 가게를 지켜 주지 못했다. 양조현은 그때 배웠다. 착한 사람은 남을 살릴 수는 있어도, 자기 식구를 대신 죽여 버린다.
그 뒤로 양조현은 선의를 믿지 않게 됐다. 정확히는, 마냥 착한 사람을 싫어하게 됐다. 선한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 먼저 의심부터 했다. 저 사람은 무엇을 바라는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결국 누가 대가를 치르게 되는가. 양조현은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정확한 사람이 되는 편이 나았다. 무게를 재고, 값을 매기고, 상할 것과 팔릴 것을 구분하는 사람. 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살아남는 사람.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버지. 그리고 양조현에게 남은 것은 정육점 기술뿐이었다. 칼 쓰는 법, 고기 상태를 보는 법, 신선한 것과 썩은 것을 구분하는 법, 가격을 매기는 법…. 본래는 돼지와 소에게 쓰이던 기술들이었지만, 그것이 꼭 짐승에게만 적용되라는 법은 없었다. 사람도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고, 상태에 따라 값이 달라지며, 누군가는 팔리고 누군가는 버려진다. 사람과 고기의 차이는 이름이 붙어 있느냐 아니냐 정도라고, 양조현은 생각했다.
밤의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재미를 위해서가 됐다. 양조현은 적절한 사람을 찾는 눈이 좋았다. 없어져도 곧 빈자리가 잊힐 사람. 애초에 세상이 오래 붙들어 준 적 없는 사람. 울어도 들어 줄 사람이 없고,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도 부를 이름이 없는 사람. 그런 이들을 골라 값을 매기고, 넘길 곳을 정하고, 필요하다면 손수 도축해 납품했다. 양기선육은 잘나가는 정육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양조현은 밑바닥에 놓인 사람을 보는 일을 좋아했다. 누군가가 제 발밑까지 기어 내려오는 순간을 보면 마음이 놓였다. 저런 사람도 있구나. 나보다 더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 확인은 양조현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찾지 않는 세상 역시 즐거웠다.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게 굴러갔고, 누군가의 부재는 티도 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양조현은 은근한 우월감을 느꼈다. 그들과는 달리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아내는 나를 찾을 테니까.
양조현에게는 정상적인 가정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는 일은 어렵지만, 한때 손에 쥐었던 것을 잃은 사람은 그것을 다시 갖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양조현에게 가정은 그런 것이었다. 깨끗한 집, 따뜻한 식탁, 기다리는 사람, 제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 그는 그런 것들을 하찮다고 비웃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누구보다 절실하게 바랐다. 그렇기에 양조현은 좋은 남편이 되려고 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문턱 안쪽에서만큼은 남편이라는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다만 처음부터 순순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호의를 받으면 경계했고, 다정한 말은 먼저 의심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내게 뭘 바라는 거지? 왜 나를 받아 주지? 무슨 목적이 있길래…. 이 바닥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믿는 편이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목적이 있는 다정함은 안전했으니까. 값을 매기고, 대가를 치르고, 필요하다면 끊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유 없는 선의는 끝을 알 수 없었다. 무엇을 갚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받아도 되는지, 언제 버려질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양조현은 아내가 왜 자신을 사랑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을 하는 남자를. 밤마다 더러운 냄새를 묻히고 돌아오는 남자를. 좋은 사람도, 깨끗한 사람도 아닌 자신을 왜 받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럼에도…. 양조현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아내가 모든 것을 알고도 곁에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이 모든 더러움을 감내해 주는 것도, 자신을 기다려 주는 것도, 문턱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것도 전부 사랑 때문이라고. 양조현은 지금의 집이 좋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양조현은 아내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뿐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 하나에 기대어 오늘도 집으로 돌아갔다.
양조현에게 아내는 사랑이자 신앙이며,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 줄 사람이다. 양조현은 아버지처럼 잊히는 게 두려웠다.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 몇 마디와 실패만 남긴 채 사라지는 것. 아무도 오래 찾지 않고,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것. 그런 끝을 맞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더러운 일을 하며 살아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완전히 하찮은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아내만은 자신을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자신이 죽으면 슬퍼할 것이고, 이름을 불러 줄 것이고, 오래 그리워할 것이다. 양조현은 그 믿음 하나로 제 삶이 완전히 밑바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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